<오래된 미래>의 작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서구문명에 의해 파괴된 가치의 단절을 복구하고자 전통의 되새김을 제안했다. 히말라야 아래 라다크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살 때 가장 행복했음을 저생산체계 구축과 느림의 철학이 입증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응원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때이다.” 우리 땅에서 채득한 생태적 지혜는 낡은 것이고, 타 문명의 디자인이 세련된 것으로 추앙받는 가운데 지킬 것과 내어놓을 것의 경계도 불분명해졌다. 목수 양석중은 ‘전통은 과거의 오늘’이라고 설명한다. 훗날, 과거의 오늘인 지금의 우리 것이 다름 아닌 서구 디자인의 답습이었음을 확인한다면 그 부끄러움은 무엇으로 보충하겠는가. 후대는 ‘오래된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지금의 세대를 두고 책망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 세대에서도 그 미래는 쓰여야 한다. 소목장 양석중의 입을 빌어 “한국 사람이 채득한 생태적 지혜가 우리 목가구의 특징을 낳았고, 소목장(小木匠)들의 손을 빌어 최신의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주장을 뼈아프게 새기고 있었다.
목리는 가장 ‘현대적인’ 디자인
강화 땅 소목장 양석중은 요사이 다른 나라 전통과 경쟁 중이다. 느닷없이, 그러나 도적처럼 불쑥 이 도전은 찾아왔다. 전통공예 현대화의 명분으로 불려간 몇몇 전통공예 전문가들은 유학파 강사들에 의해 디자인이 ‘현대적이지 않고 낡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쉽게 풀이하자면 잘 팔리지 않을 물건이라는 소리다. 제 눈의 안경이기에 그 렌즈가 서구에서 들여온 것이라면 그럴 수밖에.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에게 ‘미니멀’한 디자인을 요구한 강사들의 요구는 이들에게 참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고민을 안겨주었다.
사실 전통 소목가구는 대체로 개별 조형미보다는 원목이 주는 목리(木理, 나뭇결)를 최대한 살려 자연미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자연이 최고의 인테리어라는 개념에서 한옥과 가구는 거슬러 흐르지 않는 자연미를 추구해 온 것. 그러나 주거환경이 점차 변하면서 전통가구는 소중한 짝을 잃었다. 이들 강사의 주장은 한옥의 흥행 가능성은 낮으니 아파트에 투자하라는 소리로, 그럴듯하게 들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옥에서 만나는 전통가구는 그것이라 좋고, 현대식 건물에서 만나는 전통가구는 깊이를 가지기에 좋다. 이것은 독창적인 디자인이 주는 힘이다. “한국인이 지닌 감성의 목리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 소목가구는 한옥 주거양식에 적합한 평좌식(平坐式)이기에 주거환경의 변화는 전통가구의 근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맞다. 이 요구를 감내하는 것도 소목장의 역할이다. 수천 년을 그리 살아오지 않았던가, 계급의 취향, 지리적 변이, 독특한 지방색까지 반영해 변화시킨 결과물이 우리만의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 왔다. 양석중은 이 모든 가능성의 변화를 열어가는 우리 시대의 목수이다.
대기업 퇴사, 그리고 소목장으로 변신
양 목수가 강화에 들어온 때는 2001년. 자동차 공장에서 차체 철판을 만지던 시절에는 자신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이미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그였고 아내는 물론 두 딸과 막내아들 역시 걸어서 5분 거리의 학교를 제쳐 두고 서너 시간에 한 번꼴로 다니는 읍내버스를 오르내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양 목수는 소문난 운동권이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 줄곧 사회 변혁을 고민하는 활동가로 살았고, 아이에게 제대로 된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로서 행동했다. 그래서 6년간 다니던 대우자동차가 외국 자본에 넘어갈 때에 양심의 판단에 따라 사표를 던졌다.
“호구책으로 강화에서 한옥 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나이 학력 불문’이라는 공고만 보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죠.” 나이 서른여덟 먹은 일당 4만 원짜리 목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연장도 손에 익지 않던 어느 날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문짝 만드는 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현장 일을 그만 두게 된 것. 속칭 오야지라 불리던 사내는 목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문짝 만드는 일에 도전 할 놈 손 들어보라고 말했다. 양 목수는 망설이지 않았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무작정 내가 하겠노라고 손부터 들고 나갔다. 그 다음날부터 그의 신분은 문짝 짜는 소목장이였다.
“사고로 그만 둔 목수의 것을 따라 만들다보니 얼추 비슷한 모양이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물려받은 손재주는 있었나 봐요. 잘못 만들었다는 핀잔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신이 날 수밖에요.” 그러나 이 신나는 일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개당 4만 원짜리 문짝이 완제품으로 들어왔다. 당시 제작비는 20만 원 남짓이었다.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적자는 쌓였다.
인생 2막 1장, 나무와의 첫 대면은 그에게 시련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나무 만지는 일을 단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이 무대는 단막극이 아니다. 인생 2막이 열렸고 곧 정점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믿었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겠다 싶어 다시 일거리를 찾은 게 전통목가구 제조였다. 알아서 배워야하는 한옥 짓는 일보다는 스승을 두고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가, 가구의 길로 그를 이끌었다.
“여기저기 받아줄 만한 곳이 있나 싶어 기웃거렸죠. 그러다 인터넷에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를 찾아냈죠. 사전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찾아가 등록부터 마쳤습니다.”
양석중은 그곳에서 인생 2막을 절정기로 이끌 큰 스승을 만난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박명배 명인이다. 스승 박명배는 평소 무형문화재는 전통 기술을 변형 없이 지키는 것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계승 발전해야 하며, 이수자 양성 의무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문화의 집에서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소목반을 맡아 후학을 키우고 있었다.
양 목수는 박명배 선생을 만날 당시의 기분을 ‘제대로 배워 써먹어야겠다’는 의욕으로 가득 찬 시기로 기억한다. 그러나 빨리 ‘써먹으려고’ 찾아간 그곳에는 목수의 기본을 헤아리는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3년의 과정 중 처음 1년은 공구를 다루고, 만드는 법을 연마했다. 2년차는 그렇게 만들어진 끌과 대패, 인두 등으로 나무와 소통하는 기본을 배웠다. 3년차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음과 짜임을 통한 결구를 가져갈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졸업이었다.
당시 이 과정을 성실히 이수한 제자들에게는 전문가 과정 격인 ‘목야회’(木也會) 가입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양 목수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은 어떻게 가르치나 궁금해 이곳저곳 기웃거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욕심이 열정을 앞질러버린 경우다. 혹자는 전통 목가구를 제작하는 인고를 ‘생활의 결’을 다듬는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관계의 결 또한 따져보는 것이 전통목수의 세계였다. 양 목수는 졸업 이후 일 년의 시간을 저 혼자 견뎌야 했다.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더듬어 당기고 자르는 시간이 이어졌다.
양 목수는 나무를 다듬는 과정 중 정작 매끈해지고 광택이 흐르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오랜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사람의 소목장은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이어 팽창하고 수축하는 나무의 물성을 따져 숨구멍을 연다. “우리 선조들은 가구 모서리를 맞출 때 나무와 나무 사이에 1∼2mm정도 틈을 주며 숨을 쉬게 만드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1년이 흐르고 그 이듬해 스승에게서 목야회에 들어와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스승의 가르침 “원리를 알고 배운 것을 실천하라”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 전승과정 중 그는 삼층장을 출품해 2013년 38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스승 박명배 장인이 1992년 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후 21년 만이다.
“소목 세계에서 14년 연륜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이쪽 계통에서 20∼30년차 이상 된 목수들도 많으니까요. 단지 훌륭한 스승을 만나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전통기법의 과학적인 근거와 원리를 깨우친다면 배움의 시간은 앞당길 수 있습니다.”
느티나무로 짠 두벌의 삼층장은 심사위원들에게 정교한 비례비, 짜임 기법이 섬세해 전통공예의 멋스러움과 가치를 잘 보여준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옻칠 대신 유칠을 택했다. 광택과 수막 기능, 나뭇결을 최대한 잘 드러내기에 전통유칠만한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양 목수는 “수상 이전이나 이후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시기를 보내면서도 2009년부터 진행한 ‘동유’ 재현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흔히 유동나무 열매를 짠 기름으로 알려진 동유는 그 정확한 가공 방법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의 가구에 널리 쓰였다. 전통과의 단절기인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유 제작법은 사라지고 약품으로 불리는 변칙이 그 자리를 대신해 왔다. 그는 남해안과 제주도를 뒤져 유동나무 자생지를 찾아냈다. 그러나 이 성과가 동유를 만들어내기 까지 과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양 목수는 유동나무 열매를 통째 들기름 짜는 기계에도 넣어보고, 전통 가마솥에서 덖어내기도 했다. 매번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성과가 있다면 점성을 가진 유칠은 목질에 잘 쓰며 들어야하고 잘 건조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 반대의 경우 잘 마르지 않고 고약한 냄새가 풍기기 일쑤였다. 양 목수의 실험은 5년 차에 접어들면서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잘 팔리는 물건 만드는 일 만큼이나 옛 것을 복원하는 일에도 관심을 둔 그는 ‘내가 만들어 되살리겠다’는 정신을 그의 스승으로 부터 본받았다.
박명배 장인은 지난 2012년 일본의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한 조선 옛 가구가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각고의 노력 끝에 이를 되살린 장본인이다. 그 역시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실천한다는 생각으로 조선가구 최고 예작 중 하나인 강화반닫이 재현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강화반닫이 특징은 가로, 세로, 높이 비율이 다른 지역에 비해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넓다. 또 자물쇠총 받침쇠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곡길목 양식과 달리 문판(門板) 안쪽에 자리하는 직길목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고정이나 설치가 쉽지 않을 뿐더러 중심이 틀어지면 문판 배목과 맞지 않아 길목이 들뜨게 되므로 타 지역의 것보다 훨씬 정교한 작업이 요구된다.
그는 현재 강화 땅에서 강화반닫이를 제작하는 유일한 소목장이다. 그렇다고 지원이 따르는 일도 아닌 재현을 천직으로 알고 전통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설명을 덧붙이면, 궤짝의 윗부분을 반씩 여닫을 수 있다하여 이름 붙은 반닫이는 예로부터 의복과 서책, 제기 등을 보관하고 침구류를 올려놓거나 집안 소품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였다.
목재 선택은 엄격할수록 좋다
“기계가 보이는 기능적인 측면은 절대 사람의 그것을 넘어설 순 없습니다.” 양 목수는 전통 돌대송곳이나 그므개, 탕개톱, 쌍사밀이 등 수공구를 직접 제작해 사용하고 있다.
“박명배 선생님의 가구를 보면 철과 돌 등 부재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체의 편리를 버리고 손작업을 통해 자연의 소재와 완벽한 소통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장을 보관하고, 제작하고, 연마하는 방법을 익혀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양 목수는 우리 공구를 통해 우리 가구를 제작해야만 제대로 된 멋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기계를 배척하자는 입장은 아니다. 단지 기계화 역시 전통공구의 바탕 위에서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논리다.
그는 연장 욕심이 많고, 나무 욕심이 끝없는 사람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구할 수 없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그를 좋은 것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게 만든다.
“처음 목공을 접하던 시절 푼돈이라도 생기면 숭례문 옆 복숭아골(지금의 중구 양동)로 달려가 공구 구경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일대에 대기업 건물이 들어설 것이라 상가가 곧 철거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차, 싶었죠. 전통공구를 다시는 만져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죠. 그래서 문 닫기 전에 한 놈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생각에서 가져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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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실용 의복 수납장으로 제작했다. 참죽나무로 최대한 간결한 형태로 울거미를 제작했고, 전면 문은 오동나무를 불로 지져서 벗겨내는 낙동기법을 사용했다. |
그의 창고에 수북이 쌓인 나무만 해도 그렇다. 좋은 나무를 확보하는 일과 알맞은 건조법이 작업의 연장선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와우목공방 좋은 자리마다 느티나무·먹감나무·참죽나무·엄나무·오동나무 등이 가득하다. 잘 마르는 자리는 모두 나무가 차지하다 보니 정작 자신의 작업실은 건물 뒤편에 있다.“전통가구에는 우리 땅에서 자란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쓰입니다.
복판에 새겨진 태극문양을 보면 본연의 색을 따져 먹감(검정), 참죽(빨강), 은행(노랑) 나무가 쓰였습니다.” 양 목수는 이러한 다양한 자생나무를 찾기에 강화도만 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특히 강화산 오동나무 품질 면에서 전국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강화도의 자연환경이 좋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은 내륙에 비해 나무 구하기가 쉽고,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는 임산지에서 원목을 구해 직접 가공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벌목된 나무가 이곳으로 옮겨져 숙성되는 과정을 보살피는 작업이 좋은 가구를 만드는 일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의 친구가 된 산지 주인은 ‘부족하다’ 말하면 공짜로 내어주고 ‘필요하다’ 그러면 에누리에 나서는 이다. 그래서 좋은 나무와 사람이 많은 강화도를 떠날 계획이 없다.
“간혹 월넛 과 같은 수입목재로 가구를 만들어 달라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목재는 서울로 나가 유림목재 등지에서 주로 구입하는 편입니다. 목재구입 기준은 나름 엄격한 편입니다. 숙성 면에서 믿고 쓸 수 있느냐가 잣대이죠.”
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삼층장의 경우 제작기간만 꼬박 10개월의 노고가 들어갔다. 자칫 나무가 뒤틀리기라도 한다면 오랜 기간 가졌던 수고는 물거품이 된다.
전통가구는 의미와 가치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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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티나무로 제작한 강화반닫이다. 강화반닫이의 전형을 재현하고, 내부에 서랍과 고비를 달아 원형의 가장 발전된 형식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모두 적용했다. |
나무는 원목 상태로 2년, 제재된 후 판재로 밖에서 3년, 다시 실내에서 2년 정도 말린 후에야 가구제로 쓰인다. 그 만큼 건조·숙성의 과정이 완벽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사이 젊은 작가들의 제품을 살펴보면 과연 저 디자인이 살아서 움직이는 나무의 변화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디자인과 한 시대의 가치를 함께 수용해야하는 소목장의 고민, 이제 앞서가졌던 고민의 흔적인 그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의 정리할 차례다.
어느 날 양 목수의 대학시절 은사인 서울대 인류학과 이문웅 교수는 목수가 된 제자를 찾아 공방을 찾아왔다. 이 교수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랜트 매크래켄의 책 <문화와 소비(Culture and Consumption)>에 등장하는 ‘큐레이터적인 소비’(curatorial consumption)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사람들은 물건에 단지 그것의 기능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미를 부여하여 그 가치를 높이 산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물건이라도 자신에게는 다른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을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행위가 ‘큐레이터적인 소비’이다.
이 교수는 말했다. “전통가구 또는 전승공예는 단지 옛 것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사회문화적인 상황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조정 또는 변형을 가해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가구를 만들려는 시각을 가지는 것이 바로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이다.” 양 목수의 대학시절 은사는 양석중의 가구에서 그 가능성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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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수상작. 목리가 좋은 느티나무 용목으로 전면의 판재를 구성하였고, 기둥과 쇠목은 튼실한 느티나무 곧은결을 골라 면 분할과 비례미가 돋보이도록 구성하였다. |
공예대전에서 최종 심사를 담당했던 최공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역시 이러한 면모에 후한 점수를 매겼다. “아주 보수적으로 전통 기법을 고수하면서도 기둥의 너비와 폭, 머름칸의 비례, 재료 선택에 있어서는 현대적 미감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이 정도면 조선시대에도 충분히 있을 법한 디자인적 변화이다.”
전통가구는 팔방미인이다. 장석의 재배치나 과감한 생략만으로 조선의 가구는 초현대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소목장의 화장법에 따라 이 민낯의 얼굴은 조선의 것이기도, 2014년 서울 명동의 것이 되기도 한다. 소목장 양석중은 이런 목리의 여인과 함께 현대라는 전통의 한 시절을 보내며 문화인류학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양 목수는 강화도를 떠날 생각이 없다. 그는 앞으로도 강화반닫이 재현과 계승에 몰두할 것이다. 그리고 스승 박명배의 작품 세계를 정리해 사료로 남기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다. 누가 “또 다른 바람은 없는가?” 물을 때마다 미처 답하지 못한 계획이 그의 머릿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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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층책장은 장석을 최소화해 전통 목가구가 갖는 비례미나 선의 미감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
“이곳 강화도 어딘가에 목공 작가들이 어우러지는 마을을 열고 싶습니다. 강화 땅은 살기좋은 곳이고, 나무는 정을 나누기에 좋은 소재입니다.” 그가 열고자 희망하는 인생 3막은 ‘어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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