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기원과 집의 관계
잉여의 가치를 기억하는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특별기획전 <공예로 짓는 집>
집은 몸과 마음이 살아가는 주거 공간이다. 거주인의 취향을 담은 온갖 기물들이 실용으로 활성화되는 분주한 곳이지만, 집은 무엇보다 생명과 서사가 탄생하는 절대적 장소다. 건축에 장소성이 스며들지 않거나 방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단지 기계적, 기능적 집일뿐이다. 이런 속성과는 무관하게 집 짓는 일이 어느새 남에게 의뢰해야 하는 비즈니스가 된지 오래다. 표준화된 공법과 건축법을 따라야 하고 효율적인 재료를 선택해야 한다.
산업화된 건축 공법이 아무리 뛰어난 설계를 그린다고 해도 한 사람, 한 가족의 서사와 생애를 모두 아우를 수는 없다. 집은 오늘의 결과가 아니라 내일의 삶을 짓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건축은 삶의 배경을 짓고 사물은 삶의 연유를 짓는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짓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과 사람과 사이에는 사물이 동거한다. 그렇다면 사물은 집에서 무엇을 짓고 살아가는 것일까, 이제 그 질문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짓는다는 것’
사람은 매일 무언가를 ‘짓고’ 산다. 농사를, 밥을, 글을, 미소를, 표정을, 매듭을, 마음을, 생각을, 관계를... 그 모든 것을 짓고 산다. 집은 ‘짓다’를 위한 내밀한 장소이며 추위와 날짐승의 공격과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보호를 받는 요새다. 또한 사생활의 무한성과 취향의 저장소이면서, 배부름과 게으름까지 자유롭게 짓고 멈추기를 반복하는 자아(自我) 잉여의 산실이기도 하다.
집에는 사람과 함께 사물이 살아간다. 장식물과 소비재가 혼재하는 요즘, 집의 사물들은 장식으로 잠시 머물거나 쉽게 소비된 후 버려진다. 퇴고의 흔적이 서사의 발단이 되는 경우는 점점 희박해졌다. 사물의 질감과 무게, 소리와 감각들의 교차하면서 누군가의 삶을 표상하는 시절은 지나간 듯하다.
집은 그 자체로서 사물이다. 집이 사물을 짓고, 사물이 집을 짓는다. 구조를 이루는 기둥과 보, 바닥과 벽은 사물의 궤적이다. 전통적 집짓기는 손기술이 잘 드러났다면 현대 건축 공법은 퇴화된 손작업 자리에 산업 공학적 기술과 건설 시스템이 대신한다. 한국의 전통 건축은 기둥, 보, 벽의 대부분이 노출되어 있어 가구와 함께 주요한 사물이었으나 지금의 건축은 그렇지 않다. 요즘 집은 사물과의 관계가 낯설고, 배타적이면서 집의 서사가 옅어지거나 삭제되는 중이다. 집을 잘 짓기 전에, 삶을 잘 짓기 위한 숙고의 시간을 가지는 방안의 하나로 공예로 짓은 집이 우리 앞에 있다.
서울공예박물관이 펼치는 특별기획전《공예로 짓는 집》은 현대 건축 공법을 실리와 실용적인 면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꽉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잃거나 놓치고 있다는 상실감에 대한 회복 운동 차원에서 출발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공예는 사람과 삶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하지만 산업화에 의해 그 역할이 축소되면서 실내 장식과 실용의 역할에 제한되어 소구되는 것이 요즘의 공예다. 미술 영역으로 확장되면 좋겠지만 모두의 동의를 구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한국 공예는 ‘기물(器物)과 정진(精進)’이라는 양가적 역할을 감당해왔다. 잘 만들고 잘 쓰는 것에서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는 정진의 세계로까지 이어졌다. 공간과 사물의 구분 없이 서로를 잇고, 짓는 절친한 관계였다. 그 맥락에서 공예는 삶과 함께 집을 이루는 근간이었다. 산업 사회가 생산하는 집과 사물이 여전히 다음 세기를 주도하겠지만, 공예로 짓은 집의 속성은 ‘내일의 건축’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건축의 시선, 공예의 감각
공예가 바라보는 집은 사물의 감각을 짓는 장소다. 보는 건축에서 체험하는 건축을 위해 사물의 기능과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 빛과 바람이 적절하고 촉각과 청각이 사물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좋은 집의 중요한 요소다. 모든 감각과 경험이 소통하는 실존적 공간을 공예가 지켜보고 있다.
일상에서 ‘평상’, ‘마루’라는 언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그것을 담아내는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다. 마당이 없으니 평상의 자리가 없고, 집의 구조가 바뀌니 마루도 없다. 마루는 방과 방의 관계를 잇는 소통의 공간이다. 앉거나 누운 채 나무의 질감을 느끼고 비빌 경우가 없으니 재료에 대한 감각은 둔해지고, 윤이 나는 사물에서 베어나는 질료의 이치를 느끼지 못한다. 오늘의 사물은 정보에 의해 판단하고 구매를 결정한다. 사용 가치보다 교환 가치가 우선하는 실정에서 사물의 서사가 일어나기 쉽지 않다.
현대 산업 구조가 건축 재료를 표준화하면서 재료마다의 물성과 사용 경험은 소멸하거나 동일하다. 같은 집에서, 같은 사물을 소비하고, 같은 감각을 공유하는 현대인에게 차별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공예적 집짓기는 점점 멀어져 왔다.
마루의 자리를 모노륨 장판이 대신하는 현실이지만, 인간의 감성이 자연에서 완전히 이탈하기 전까지 공예의 가치는 유효하다. 음악 체험이 실제 연주보다 스피커의 증폭된 소리에 기대는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높은 천장과 벽에서 울리는 소리의 공감각을 오디오가 대신할 수는 없다. 소리의 본질이 공고할 때 공간의 역할은 두드러지고, 사물의 서사가 긴요할수록 공예가의 질량은 더 질기고 두텁게 살아 있을 것이다.
집의 기분과 분위기
집은 사람의 기운과 사물의 태도가 공간감을 이룰 때 ‘기분’과 ‘분위기’를 연출한다. 거주자의 기분은 사물을 일깨우고, 사물은 기분을 일으켜 분위기를 연출한다. 분위기는 사물과 공기의 협업에 의해 객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사물에 감성적 역할을 부여하면서부터 사물은 인지되고 돋보인다. 건축에 있어 공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천장은 공간의 분위기를 잉태하는 곳이라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붕의 형식에 의해 구조화되는 천장 내부는 허공이 아니다. 열기와 냉기로 다져진 이곳은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심리적 여백이다. 또한 천장은 기분을 조성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집 안의 복잡한 시선을 잠시 쉬게 하는 장소다. 중세 교회 건축의 높은 천고가 신을 위한 자리였다면, 집의 천장은 거주인의 기분을 위해 분위기가 머무는 곳이다.
분위기를 위한 사물은 관념화된 상태가 아니라 다양한 속성과 양태로 생성되는 잠재적 질료이며 공예의 최종적으로 머물 귀착점이다. 성당과 사찰의 건축을 텅 빈 공간으로 남겨두는 이유는 건물 내부의 시각 노이즈를 차단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어지러운 내부의 시선을 가다듬는 것은 공간과 사물의 비례감과 절제로 선택한 사물의 위치, 그리고 엄격한 조도다. 낮의 조도는 창의 위치와 크기가 감당하고 밤의 조명은 인위적인 조명 값으로 조절한다. 하지만 사물의 이치가 바라는 방향과 위치에 순응해 사물이 필요한 이유가 아니라, 필요 없는 이유를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 현대 공예의 진심이어야 한다. 사물의 위치값은 곧 공예의 위치값이다. 공간과 사물이 지시하는 당연과 순연의 뜻에 따르는 것이 공예가 날로 새로워지는 방법이다. 기분과 분위기의 서로 높은 밀도를 유지하고 선순환하기 위해서는 공예 순혈주의가 그 바탕에 있어야 한다. 적당히 산업적이고, 필요에 따라 미술적인 태도로는 ‘공예의 집’을 지을 수 없다.
공예로 짓는 집을 순례하다
《공예로 짓는 집》 전시 공간은 조각가 금민정의 상상의 문(門)에서부터 출발한다. 그의 설치 작업은 공간의 기운을 유발한다. 오래된 문의 군집은 특정 장소의 시간성과 서사를 추상화해 문의 색다른 정서를 회복했다.
집의 바닥은 이영학, 김건수, 정명택 3인 작가의 농밀한 해석이 기다리고 있다. 주춧돌, 바닥돌 등의 버려진 돌덩이에 이끼와 생이가래를 감싼 이영학의 땅바닥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통로를 열어준다. 한국 고유의 자연주의 정신을 매개하는 돌을 3D 프린트 기법으로 오브제화한 김건수의 바닥은 영원불멸의 기원을 감지할 수 있고, 한옥의 마루 널을 천장에 설치한 정명택은 마루 원형의 기능, 형태, 구조, 의미를 각별하게 전한다.
집의 기초와 이어지는 기둥은 젊은 공예가 손신규와 신유가 맡아 구조주의 가구 미학으로 대체했다. 손신규는 물질의 이질과 대칭성을 기반으로 전통과 현대, 유연함과 규격의 관계를 사물화했고, 신유는 고착된 전통에 현대성을 입력해 가구와 기둥의 관계를 설정했다.
또한 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면서도 그 존재감이 미미한 벽이 공예의 호흡으로 되살아났다. 강석영은 불이 가하는 흙의 형태와 변이의 우연성을 필연적 서사로 치환해 벽체를 세웠다. 유약과 빛이 반응하는 색과 절제된 형태와 질감을 통해 벽의 운동성과 색채의 감흥을 일으키는 유상덕은 단순한 벽을 명상의 세계로 이끌었고, 이어서 젊은 옻칠 작가 유남권은 옻의 농도 변화를 겹겹의 층위로 쌓아올려 옻칠 회화를 피안의 세계로 안내한다. 조형예술가 차승언은 직조 설계를 실현한 아트월을 회화적으로 구현해 공예와 건축의 교차점과 차별점을 시사했고, 국가무형유산 염장(簾匠) 보유자인 조대용은 전통 발 작품으로 공간의 경계와 개방의 시각적 의미를 제시했다.
천장 보의 공예적 변화는 임광순과 마승범 두 작가가 맡았다. 임광순은 한국 전통 건물의 각종 부자재를 활용해 현대적 오브제 가구를 제작하여 보의 기능과 비기능의 유기적 공간을 연출했으며, 마승범은 보의 구조적 역할에 숨겨진 기능을 심어 보와 기둥에 심미성과 정신성을 녹여내어 존재감을 부각했다.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창은 유리 작가 이규홍이 기존 건물의 창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덧대는 유리 버티컬이라는 형식으로 빛의 찬란한 유희를 일으켜 건축에 시각적 진동을 주었고, 노방천과 아크릴을 맞대어 공간 조형을 제시한 아트퍼니처 작가 이현정의 창은 외부 환경을 추상적 세계로 초대했다.
건축의 얼굴이자 몸의 형태를 결정짓는 지붕은 국가무형유산 제와장(製瓦匠) 보유자 김창대 장인이 맡았다. 그는 서울공예박물관이 위치한 터의 안국동 별궁 한옥들 수리 과정에서 복원한 장식 기와(취두, 용두, 토수, 수키와, 암키와, 수막새, 암막새 등)를 눈앞에 설치함으로써 건축의 품격과 역사성을 가늠하게 한다. 또한 전통 공예를 3D 프린팅 기법으로 재현하는 데 일가견을 가진 류종대 작가는 1980년대의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기억을 디지털 크래프트 기법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건축의 실험적 기법을 선보인다.
공예가 읽어내는 건축
분위기를 환기하며 새로운 공간의 세계를 여는 문고리 프로젝트는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문고리를 통해 우리를 새로운 체험의 장소로 초대한다. 핀란드 건축가 유하니 팔라스마(Juhani Pallasmaa)는 “문손잡이는 건물이 건네는 악수다.”라며 건축과의 첫 대면을 작은 문고리로 정의했다. 문은 경계가 열리는 장소이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경험의 출발점이다. 열림과 닫힘의 인지는 문소리에 의해 결정되고 동시에 그 소리는 내부의 낯선 신비감을 선사한다. 문은 재료의 질감과 무게감을 촉각으로 전달하는 질료를 가지는데, 이것의 출발점이 바로 문고리이다. 문이 내부 세계와의 일치감을 제공한다면, 창은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지향한다. 투명한 창이 드리우는 외부의 풍경이 불편하거나 개인성을 침해한다면 커튼이나 색유리로 제어할 수도 있다. 내부 세계를 대면하게 하는 문과 외부를 대상화하는 창이 기능을 넘어 감각으로 접속하는 사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어쩌면 건축에 있어 공예의 매개 역할이다.
필란드 건축가 유하니 팔라스마는 빛, 물질성, 자연을 건축의 얼개를 이루는 근본 요소라 단정했다. 건축이 부풀어진 외형을 통해 신을 추앙하는 비감각적 사물이 아니라면, 내밀한 감각의 경험이 만개하는 건축이야말로 건축의 궁극적 종착지가 아닐까 자문해 본다.
문고리에서 이어지는 집의 기둥과 벽은 삶의 이력과도 견주어 볼 수 있다. 기둥과 벽은 사람의 시선에서 감춰져 있지만 공간의 구축자이다. 기둥과 보, 벽에 균열이 있다 해도 결코 허물거나 삭제할 수 없다. 삶의 기둥과 벽도 마찬가지다. 고통과 슬픔으로 축조된 기억과 매일 마주하는 일상이 인생의 기둥이자 내력벽이다. 굳은살과 뭉친 근육, 금이 간 뼈로 이뤄진 벽과 기둥을 보기에 흉하고 거슬린다는 이유로 잘라낼 수 없다. 슬픔이 몸을 받들고, 통증이 몸을 움직이는 인생의 내력벽이 있기에 그 안에 매일의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집의 기둥과 벽은 그 집이 존속하는 한 어떤 식으로든 버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재생 건축이, 삶의 재생과 지속이 가능하다.
정량이 아닌 정성적 공간
인간의 감각은 크로노스 Chronos와 카이로스 Kairos로 나뉜다. 객관적・정량적인 물리적 시간 ‘크로노스’, 주관적・정성적인 질적 시간인 ‘카이로스’를 교차하면서 공간과 감정의 상태를 수용하고 기억장치에 저장한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자신의 바람과 다르게 크로노스의 시간을 소비한다. 그 까닭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건축적 측면에서 공간 구조의 한계 때문이다. 한국인의 70%가량이 아파트형 공간에 거주한다. 높이 2300mm의 획일적 층고는 상상과 감각을 활성화할 수 없다. 도심의 상업 공간에 대중들이 몰리는 이유는 높은 층고와 감성적 인테리어, 건축의 시간성까지 더해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현대인들의 도피처이자 여행지이다. 각자의 방에서 디지털 하우스 ‘구글 서버’에 안주하는 것이 요즘의 신문명 앞에 카이로스는 없다.
건축가 곽재환은 저서 『짓다』에서 건축의 의미를 5행으로 규정했다. ‘삶’, ‘앎’, ‘놂’, ‘풂’, ‘빎’, 즉, 기운을 도모하고, 수행하고, 창조하고, 상생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느린 집’이 좋은 집이라고 말한다. 자연과 생명이 순환하고, 장인들의 노고와 수고가 여물어져 있고, 여러 사람의 참여 과정이 사유로 이어지는 집. 여기에 햇빛과 바람이 순환을 이루는 집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창의 풍경보다 단열의 이기에 자연 바람은 단절되고 열교환기를 인위적으로 배치해 강제로 공기 순환을 가동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정량적 집의 현실이다.
고독한 사물이 짓는 ‘잉여의 집’
특별기획전 《공예로 짓는 집》은 건축과 공예의 밀회를 통해 아름다운 집을 도모하는 기획전이다. 제대로 ‘짓기’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구축하고자 하는 심사숙고이기도 하다. 집과 사물은 개인의 세계관을 지켜주는 공간이다. 내일을 위한 에너지 창고이면서 삶을 감지하는 물질과 기능의 여정이다. 집은 생활 파편이 채워지는 부지런한 공간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자기만의 고독을 대면하는 침윤의 공간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자부심이자 성찰의 시간이다. 소모적인 외로움을 지우고 선택적 고독으로 의지 충만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 그 집은 당연히 공예가 사는 집이어야 한다.
공예가 지은 집은 절제한 후에 따라오는 고독의 기운이 살아 숨 쉬는 촉촉한 사물이 자리하는 공간이다. 돌과 흙과 나무의 고독이 집의 틈새와 사물의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공예의 잉여 가치는 피어난다. 정답보다 오답의 범위를 줄이고, 맞서기보다는 묵묵히 자기 길을 찾아가는 공예로 지은 집이 더욱 그리운 시절이다. 현대 건축의 이기적 공법과 재료의 획일성으로는 고독한 사물의 공간을 추리할 수 없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건축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이 살아가는 ‘장소’라면, 그곳은 미세한 손 떨림이 지시하는 사소한 습관과 어제의 오늘이 사는 집이어야 한다. 그것은 무언(無言)의 사물이 짓는 그리움의 잉여가 서사로 이어지는 ‘공예로 짓는 집’이라 말할 수 있다.
특별기획전 《공예로 짓는 집》전시는 서울고예박물관에서 25년 3월 9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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