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목수] 명장 이성준...나무에 심성을 담다

장상길 기자 / 기사승인 : 2026-02-28 09: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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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기예는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진다. 나무에 담기는 마음도 깊어진다.

 

<201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3층 전시장에는 마치 설치작품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의 닫집을 재현한 것으로 중앙에 놓여 있던 옥좌를 비롯해 좌등까지 실물 그대로 닫집을 재현한 이는 명장 이성준 목수다. 나이 열 셋에 고향인 충주에서 목수의 길에 뛰어든 이성준 명장은 올해 고희를 맞이했다. 자그마치 57년을 목수로 살다가 고희를 맞이한 이성준 명장에게 남은 목수의 일은 선조들의 지혜와 혼을 빌려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기타 만들고 농 짜던 목수 신동

 

해방둥이인 이성준 명장은 1958년 목수의 길에 들어섰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나이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돼 무작정 장터의 농방을 찾아갔다. 뭐든 스스로 밥 벌어 먹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목수가 살던 충주의 신니면 용원리는 한양과 영남지방을 잇는 영남대로의 길목으로 장터가 꽤 커 농방이 두 군데나 있었다. 농사일 말고, 남의 집 머슴 사는 거 말고 달리 할 일이 없던 시대에 장터의 농방은 호구지책 삼을 기술을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술 배울 수 있는 곳이 더 있긴 있었다. 이발소와 자전거포. 이성준 명장은 그 중 목수 일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목수를 업신여기던 조선의 전통은 그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푸줏간 주인이나 목수를 하대하던 분이었다니 목수되겠다고 조르는 아들이 영 못마땅했을 것이다. 목수는 허락을 받을 때까지 몇날 며칠이고 아버지를 졸랐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마침내 아버지 허락을 얻은 소년은 그저 기술만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졸라 농방 출입을 시작했다.

소년은 도시락을 싸서 다니며 어깨 너머로 목수가 나무 다루는 방식을 깨우쳐나갔다. 그런데 농방에는 목수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목수 일을 접하는 시간보다 허드렛일에 허비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추수철에는 벼이삭을 나르고, 주인집 애가 울면 업고 달래는 일까지 도맡았다. 머슴살이나 진배없었다. 기술 배우는 조건으로 사람을 머슴처럼 부릴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소년은 짧은 시간이나마 목수들이 나무 다루는 걸 눈으로 익히며 목업의 원리를 깨우쳐 갔다. 6개월 후에는 밥은 먹여주는 조건으로 농방을 옮겼다. 거기서 끌이며 대패 같은 연장 다루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눈으로 익힌 목수 기술을 틈날 때마다 혼자서 연마했다. 그렇게 눈으로 받아들인 목수의 기예가 몸으로 전이됐다. 반 목수 반 머슴으로 2년을 드나들자 기특했는지 농방 주인이 그때 돈 500원을 명절떡값이라고 손에 쥐어줬다. 소년이 태어나서 처음 벌어본 돈이었다. 그 돈을 고스란히 어머니께 드리니 어머니는 그 돈으로 자명종 시계를 샀다. 그새 집안이 형편이 좀 나아져 새벽밥 먹고 중학교에 다니던 동생을 위해 처음 손에 쥔 500원을 쓴 것이다. 

 

 


소년에게 목수 일은 기울어진 가세에 보탬이 되는 기특한 일이었다. 비록 큰돈은 집에 갖다 주지 못해도 소년이 닦은 목수기술은 집안을 위해 요긴하게 쓰였다. 소년은 누나의 혼수로 쓸 농도 손수 짰다. 소년의 나이 열다섯, 누나는 열아홉 새색시였다. 소년은 나무로 고르고 마름질해 구멍을 파고 다듬는 그 순간에 신명을 바쳤다. 만듦새도 단단했는지 소년이 짠 농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동 나왔다면 소년을 추켜세웠다. 누나는 그 농을 버리지 않고 오래도록 간직했다. 이사 다니며 흠이 나고 깨지기를 반복해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누나를 위해 농을 짜던 그 때의 신명은 여전히 이성준 명장의 마음에 살아 있다.

소년은 기타도 만들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은 뭐든 통하는 데가 있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소년은 기타를 요모조모 뜯어보며 원리를 터득했다. 소년은 기타 몸통의 사운드보드(울림판)는 오동나무를 썼고 바인딩(측판)은 합판으로 둘렀다. 튜너(줄감개)는 소나무를 깎아 만들었고, 플랫은 신주(황동)을 박아 넣었다. 현을 만드는 게 가장 어려웠다. 삐삐선(PP선-군용 야전 통신선)의 피복을 벗겨 뽑아낸 강철선을 1, 2번 줄로 썼고 3번 선은 라디오의 동조코일에 감긴 가는 구리선을 뽑아서 철선에 돌려서 감아 썼다. 3번 줄부터는 하나 만드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릴 정도로 일이 번거로웠다. 소년이 만든 오동나무 기타는 그야말로 기찬 소리를 뽑아냈다. 소년은 그렇게 만든 기타 2개를 500원에 팔아 어머니께 드렸다. 소년은 효자 목수였다.

말은 제주도로 목수는 서울로 



기술에 자신이 붙은 소년은 서울로 가고 싶었다. 지방 장터치고는 번성한 곳이라고 해도 소년에게는 작은 물이었다. 서울 정릉에 사촌이 있어 기거할 곳도 있었다. 그 때가 1960년이었으니 소년이 목업에 뛰어든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소년은 문짝도 짜고, 고가구 수리도 곧잘 해냈다. 목수 기술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서울에서 4.19혁명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번에도 아버지가 말렸다. 소년이 서울로 올라온 건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이후였다.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소년의 의지를 아버지도 더 이상은 말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120원을 쥐어줬다. 딱 왕복차비였다. 올라가서 아니다 싶으면 내려오라는 뜻이었다.

소년의 판단은 옳았다. 당시 서울은 현대적인 주거문화가 막 도입되던 시기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주거공간의 변화는 가구의 변화로 이어졌다. 좌식문화에서 입식문화로 생활문화가 전환되면서 입식 가구의 수요가 증대했다. 60년대는 한국 가구산업의 태동기였다. 1954년 인사동에서 처음 문을 연 파고다가구나 1963년 설립된 에이스침대, 보루네오가구 등이 60년대 문을 연 가구회사였다. 목수가 할 수 있는 일도 그만큼 많았다. 쏟아지는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경공업 중심의 산업화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당시는 목수에게도 기회의 시대였다. 파고다가구를 비롯해 목수들이 회사를 차려 당시 가구산업을 이끌었다. 

 


소년은 일자리를 찾아다니다 미아리에서 목수 생활을 시작했다. 60년대 미아리 고개 아래 숭인시장 인근에는 가구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미아리 고개 인근은 하루밤새 ‘하꼬방(판잣집)’ 한 채가 완성될 정도로 속성으로 집들이 들어서며 형성된 판자촌으로 일구밀도가 굉장히 높았다. 가구 수요도 많아 일자리 얻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당시 목수를 고용하는 기준은 목수가 가진 연장이었다. 연장을 보여주면 그 자리에서 채용 여부가 결정됐고, 목수들은 속칭 “우께도리” “데마”라고 부르던 도급제 방식으로 일을 했다. 가구 하나 만들면 정해진 마진을 버는 우께도리는 이직이 자유로운 방식이었다. 소년이 처음 만든 가구는 책상 위에 놓은 1단짜리 “혼다데(책꽂이)”나 여닫이 문 두 짝에 서랍 두 개로 구성되는 소형 찬장이었다. 찬장을 하나 짜고 소년이 받은 돈은 60원, 미닫이를 다는 3층 찬장을 짜면 80원을 벌었다. 버스비가 3원, 전차비는 2원 50전이었으니 소년이 버는 돈은 결코 작지 않았다. 소년은 돈을 벌면 대부분 충주 집으로 보냈다. 소년은 서울에 와서도 효자였다. 우께도리 물량은 보통 10개 단위로 받았다. 한 달 일할 물량이었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소년은 기술자 대접을 받았다. 시대가 목수를 필요로 했다. 시대가 소년을 목수로 살게 했다.

일은 고됐지만 목수는 서울에서 기술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소년은 미아리에서 1년, 안암동에서 1년, 영등포에서 3년 하는 식으로 가구공방을 옮겼다. 공방을 옮길 때는 공임이 늘거나 만드는 가구의 질이 올라갔다. 책장을 짜다, 서랍장을 짰고, 농을 짰다. 소년은 당시 공방이 밀집한 동네는 거의 섭렵했다. 지역마다 기술 수준이 차이가 있었고 임금도 달랐다. 그렇게 떠돌다 신설동에 자리를 잡고 결혼도 했다. 그렇게 청년 목수로 자라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말은 제주도로 목수는 서울로


 


목수는 신설동에서 10년 동안 농 짜고, 문짝 짜는 목수로 살았다. 가끔 전통가구 주문이 들어오면 반닫이도 만들었다. 여름에 가구 짜는 일이 좀 뜸해지면 돈암동이나 삼선동의 한옥 보수 현장에 가서 일했다. 인테리어 현장에서 붙박이 장식장 짜고 무늬목 붙이는 내장목수 일도 마다치 않았다. 목수는 나무 짜고 다듬는 일에 분간을 두지 않았다. 목수의 기예도 깊어졌다. 일머리가 좋아 날일을 가도 남들보다 보수가 후했다. 건축목수가 일당 1500원을 받을 때 목수는 일당 3000원을 벌었다. 1980년에는 수유리 4.19민주묘지 앞에 장미공예사란 이름으로 공방도 차렸다. 복도 찾아왔다. 주택복권 2등에 당첨되어 그 돈을 보태 수유리에 번듯한 집도 마련했다. 목수 나이 마흔을 갓 넘겼을 때였다. 순탄한 목수의 삶이었다. 목수는 그런 와중에 전통가구에도 관심을 가졌다. 우연히 전승공예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삼층장을 보고 조선 목가구의 매력에 빠진 것이다. 이성준 명장은 1984년 불교문화예술 대상전을 시작으로 해마다 이런저런 공예대전에 작품을 냈다. 돈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전통가구에 안목이 높아지면서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문화유산을 후대로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도 생겼다. 좋은 작품이 있는 곳은 박물관이건 전시회건 가리지 않고 어디든 달려가 실물을 보고 연구했다. 그러다 마음을 뺏는 작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이즈를 기록해 재현했다.

전통공예는 목수에게는 새로운 세계였다. 목수로서의 경험과 그간 몸으로 기예를 혼신을 다해 바쳐야 좋은 작품이 나왔다. 수상 경력도 쌓였고, 1995년에는 대한민국명장에 선정되는 영광도 얻었다. 공방 이름도 ‘명인’으로 바꿨다. 점차 돈 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렸다. IMF 무렵에는 가구 주문도 뚝 끊겨 세까지 밀리기 시작했다. 목수는 결국 2001년에 수유리 공방을 정리해 의정부로 이전했다. 경복궁 왕실 유물을 재현하는 일로 간신히 버텼지만 빚은 점점 쌓여갔다. 이승준이 재현한 왕실 유물은 96점에 이른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목수는 전통가구에 쏟는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돈은 벌지 못했지만 좋은 일도 생겼다. 이승준 명장은 대한민국 정부 포장도 수상했고 2경기도지사 표창장도 받았다. 전국기능경기 가구부문 심사위원도 했으니 목수의 길에서 이승준 명장이 이룬 성취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공방을 청주로 옮긴 이승준 명장은 조선 왕실의 유물을 재현하고 복원하는 일에 여생을 바칠 계획이다. 2015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선보인 경복궁 닫집은 고작 사진 한 장을 보면서 3년간 재현했다. 사진을 부분 확대해 문양이나 비례를 정했고, 먹지를 대고 나무에 새긴 문양으로 조각을 팠다. 옥좌 뒤의 일월오봉도도 이승준 명장의 솜씨다. 그림을 배운 적 없는 명장은 필요하면 뭐든 연구해서 해결했던 열세 살 소년 시절의 그때처럼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며 문제를 해결한다. 이승준 명장은 작품에 심성을 담기 위해 나무 구입에서 건조는 물론 제작의 전 과정에서 항상 꼿꼿한 정신을 유지하려고 항상 노력한다.  

 


이승준 명장의 남은 꿈 하나는 자신이 평생 갈고 닦은 목수의 기예와 지난 세월, 그리고 여생을 통해 재현하는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을 후대에게 전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남겨진 전통은 이승준 명장처럼 자기희생을 피하지 않는 분들의 열정으로 이룩된 것이다. 명장의 꿈이 결코 꿈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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